[스크랩] [논어명언명구]哭日不歌/조문한 날 노래 부르지 않다
효도와 관련된 수업을 진행할 때였다. ‘인리파사(隣里罷社)’라는 고사가 나왔다. 삼국시대 위(魏)나라 왕수(王修)는 토지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일(社日)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사일만 되면 왕수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을 지었다. 사일 동안 온 마을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왕수의 울음을 듣고서 축제를 슬그머니 일찍 마쳤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학생들은 생각이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왕수가 자기감정에 빠져서 마을 사람들의 흥을 깼으니 왕수가 잘못했다는 주장이다. 왕수가 어머니를 생각하며 애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축제를 즐길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마을 사람들이 아무리 흥겨운 축제를 즐긴다고 하더라도 왕수의 감정을 존중해야 하는 주장이다. 어머니의 죽음은 슬프기 그지없는 일이므로 왕수는 자기감정을 얼마든지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어디까지 존중하고 어떻게 공감할 수 있을까? ‘곡일불가(哭日不歌)’는 공자가 공감(共感)의 기준을 제시하는 이야기이다.
논어 술이(述而)편 10장
- 161번째 원문

• 是 : 시(是)는 지시사로 쓰이면 가까운 것을 가리키는 말로 이것, 이의 뜻을 나타낸다. 동사로 쓰이면 옳다, 바르다, 바로잡다의 뜻을 나타낸다. 시시비비(是是非非), 시비(是非)를 가리다는 후자의 대표적인 용례에 해당된다.
• 哭 : 곡(哭)은 울다, 노래하다의 뜻이다. 여기서 상례를 치를 때 조문을 가서 곡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물론 상주가 우는 것도 곡이다.
• 歌 : 가(歌)는 노래, 노래하다의 뜻이다.
배려와 공감
우리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얼마나 존중해야 할까? “내가 알 바가 아니다”라는 대답도 가능하다. 우리가 모든 사람의 감동을 헤아리며 살아간다면 극도로 피곤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장 동료, 친한 친구처럼 평소 잘 어울리는 사람의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이 경우 “내가 알 바가 아니다”라고 말하기 어렵다. 누군가 죽음을 당했거나 교통사고처럼 생명과 관련되는 불상사를 겪었을 경우 우리는 당사자와 함께하며 위로의 말을 건넨다.
공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평소 어울리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상갓집에 조문을 가서 상주를 위로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공자는 방금 조문한 상대의 슬픔에 공감을 했으므로 집으로 돌아와서도 즐거움을 표출하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슬픔에 전염되어 그럴 수 있지만 공자는 의도적으로 노래를 부르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존중하는 것이자 사람 자체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함께 어울려 지내는 사람들의 감정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그는 [논어]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다른 사람의 감정과 가치를 존중하고 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다른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될 경우가 있다. 공자는 그때 근래에 상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자신의 배를 채우려고 계속해서 음식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술이편 9장) 공자는 상을 당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으며 자신의 식욕을 만족시키는 것은 부차적이라고 여겼다.
물건은 잃어버리면 찾거나 다시 구하면 된다. 하지만 사람의 죽음은 다시 돌이킬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공자는 죽음으로 인한 고통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근원적인 상실이라고 보았다. 공자도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고 또 청소년 시절에 어머니를 여의였던 터라 상실의 아픔을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고 배려하려고 애를 썼다. 애를 쓰는 것이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우며 상대가 불편해할 수 있다. 공자는 세월과 경험을 통해 애를 쓰는 것을 자연스럽게 가다듬는 것이 사람 사이의 예의라고 보았다.
고분이가(鼓盆而歌)
공자는 죽음과 관련해서만 공감을 나타낸 것은 결코 아니다. 공자가 집에 없을 때 마구간에 화재가 났다. 오늘날 같으면 차고에 불이 난 것이다. 집에 돌아와 이 소식을 들은 공자가 내뱉은 첫 마디는 말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어디 다친 사람이 없는가?”였다.(향당편 17장) 그 당시 말은 신분의 상징이기도 하고 고가의 재산이다. 마구간에 불이 났으면 말이 다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공자는 말보다 사람의 안위를 먼저 걱정했다. 공자는 사람이 우선이라는 점을 자연스럽게 나타내고 있다.
고대에는 장애인이 악기를 잘 다루었다. 공자는 악사를 만날 때 앞에 계단이 나오면 “계단입니다”라고 말하고, 앉을 자리에 다다르면 “자리입니다”라고 안내했다. 자리를 잡은 뒤에 “아무개가 어디에 있고 아무개가 어디에 있다”라고 소개했다.(위령공편 42장)
제자 자장(子張)이 이 장면을 지켜본 뒤에 공자에게 악사를 이렇게 대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공자는 “당연하지. 그게 악사를 돕는 길이야.”라고 대답했다. 공자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 생활화 또는 체화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니 공자의 진면목을 본 사람은 그의 주위를 맴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제자가 3000명이었다고 하니 빈말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장자는 공자와 다르게 행동을 했다. 장자의 아내가 죽었을 때의 일이다. 친구 혜시(惠施)가 장자 아내의 사망 소식을 듣고 조문을 왔다. 그는 당연히 장자 집의 분위기가 엄숙하고 애도하는 소리가 나리라고 예상했다. 그는 장자 집에 들어서서 자신의 눈을 비볐다. 장자는 아내가 죽은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술동이를 북처럼 치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게 아닌가? 이를 고분이가(鼓盆而歌)라고 한다.
혜시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친구 장자를 꾸짖으며 따졌다. “자네는 한 이불을 덮고 자는 아내가 죽었는데 슬프지도 않는가?” 장자는 술잔을 내려놓고 찬찬히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자신도 아내가 죽었을 때 슬펐다고 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죽음이 꼭 슬퍼해야 할 일인지 궁금해졌다고 한다. 죽음이 완전한 종말이라면 슬퍼해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생명체의 경우 기(氣)가 모이면 살고 기가 흩어지면 죽는다. 흩어진 기는 다른 기와 결합하여 새로운 생명체로 태어나게 된다. 이렇게 보면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단계의 시작인 셈이다. 장자의 아내는 죽음으로 인해 다른 생명체로 변신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죽음이 슬픈 일만이 아니라고 보았고 이에 술을 기울이며 과거를 추억했던 것이다.
장자는 사람이 겪는 사태를 감정적으로 대응할 것이 아니라 감정의 색채를 빼고 담담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장자의 사고에 따르면 웃다가 울다가 또는 울다가 웃는 것도 무방하다. 그 사태에 충실하게 반응하면 그만이지 꼭 그래야 한다는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공자는 사람이 여러 가지 복합적인 사태를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짧은 시간 안에 한 가지 감정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과도한 ‘감정’ 노동의 요구
우리는 식당, 상점을 이용할 때 서비스가 친절하면 ‘좋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경우 식당에 음식을 주문하면 음식 값을 지불하고 별도 직원에게 팁을 낸다. 음식과 별도로 서비스에 대해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고급 음식점을 제외하면 상품 값 이외에 별도의 봉사료를 지불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친절한 서비스’를 덤으로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는 분들은 감정 노동에 시달린다. 즉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죽이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고객이 상품을 구매한 뒤에 터무니없이 이의를 제기하면, 직원은 절대로 흥분해서 안 되며 “예 알겠습니다, 고객님. 시정해드리겠습니다”라고 친절한 어투로 말해야 한다. 사정이 이보다 더 심할 경우 “손님은 왕이다”라는 사고로 똘똘 뭉친 고객이 욕설을 하거나 행패를 부려도 “고객님 어디 불편한 곳이 없습니까?”라고 응대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고객과 함께 대거리를 하거나 이치를 대며 조리 있게 따지면, 고객은 직원이 “꼬박꼬박 따진다”고 항의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실례를 KBS 2TV 예능프로그램 ‘개그콘서트’의 ‘정여사’ 코너에 등장하는 진상 손님(정태호 분)과 이로 인해 쩔쩔매는 직원(송병철 분)을 통해 여실히 알 수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감정 노동은 ‘판매 수익의 제고’나 ‘우수 고객의 유치’라는 명분으로 사람이 사람이기를 포기하도록 만든다. 사람이기를 포기해야 속이 부글부글 끓어도 웃으면서 “또 오십시오, 고객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고객에게 친절히 응대하지 않았다며 근무 평점에서 나쁜 점수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공자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존중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공자가 백화점 영업을 관리하는 책임자라고 해도 ‘개콘’에 나오는 진상 손님을 보면, 당장 “내쫓아라!”라고 할 것이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의 감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감정만을 내세울 뿐이다.
이러한 진상 손님은 길거리에 사람이 쓰러져 있어도 “왜 저러지!”하며 지나치거나 그런 사람을 외계인 취급할 것이다. 공감 능력이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성적만 좋으면 뭐든지 좋거나 실적만 좋으면 뭐든지 용서되는 ‘괴물(怪物)’을 키우면서 그 괴물이 공감 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 “왜 저러지!”라는 애교를 보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