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속으로

[스크랩] 백성들로 하여금 나라를 원망하게(爲民名判)

산과막걸리 2016. 5. 11. 05:48


위민명판(爲民名判)
[요약] (爲: 위할 위. 民: 백성 민. 名: 이름 명. 判: 쪼갤 판)
권력에 굴하지 않고 백성을 위해서 명판결을 내렸다는 말로, 외압에 굴하지 않고 정의에 입각하여 
내리는 판결.
[문헌] 목민심서(牧民心書)

[내용]  조선 제21대 영조(英祖) 때 권엄(權欕.1729~1801)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한성판윤을 거쳐 병조판서를 지냈는데, 위세에 굴하지 않고 바르게 재판하기로 유명했다. 권엄은 1729년생이니 다산보다 33세나 많은 대선배였다. 그는 1801년 신유옥사 때 같은 시파[時派= 조선() 후기()에 일어난 당파()의 하나. 사도세자()를 동정()한 남인() 계열()로, 사도세자()를 무고()하고 비방()한 벽파와 대립()함] 이면서도 천주교 신자들을 극히 미워하며, 이가환․이승훈․정약용까지를 모두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강경론을 폈던 사람이기도 했다. 

천주교도들에게 강경한 입장이던 권엄이었지만, 다산은 귀양지에서 저술한 『목민심서』에서는 그런 사감은 모두 잊고, 권엄이 한성판윤 시절에 훌륭한 인간 사랑의 정책을 폈던 점을 매우 높게 여기고 '형전(刑典) 6조 제1조 청송(聽訟) - 하(下).에서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판서 권엄(權儼)이 한성 판윤(漢城判尹)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어의(御醫) 강명길(康命吉)이 은총을 믿고 마음대로 행동하니, 조정이나 민간에서 모두 눈살을 찌푸렸다.

강명길이 땅을 서교(西郊)에 사서 그 어버이를 이장(移葬)하고, 산 아래에 전부터 있던 민가 수십 호를 모두 사서 10월 추수 후에 집을 내놓고 나가기로 약속하였는데, 그 해 가을에 흉년이 들어 민가에서 약속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강명길이 그 종들을 시켜 쫓아내겠다고 부(府)에 가서 고소하였으나, 권공이 몰아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루는 위에서(정조) 승지(承旨) 이익운(李益運)을 불러 가만히 판윤을 달래어 다시 고소가 있으면 이졸을 출동하여 민가를 몰아내게 하라고 하였다.

다음 날 강명길이 다시 고소하였으나 권공은 전의 판결대로만 하여 조금도 변동이 없었다.

이날 상께서 이익운을 불러들여 책망하는데, 우레 같이 무서운 그 상감의 진노에 듣는 사람들이 모두 목을 움츠렸다. 이익운이 권공에게 가서 그 사실을 전하니 공이 말하기를,

백성들이 당장 굶주리고 추위가 뼈에 사무치니 쫓아내면 모두 길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죄를 입을지언정 차마 이 일을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나라를 원망하게 하지는 못하겠다.”

하였다. 그 이튿날 강명길이 다시 고소하였으나 전의 판결을 따를 뿐 조금도 변동이 없으니, 듣는 자가 모두 위태롭게 여겼다. 수일 후에 상께서 이익운에게 이르기를,

“내가 조용히 생각하니 판윤의 하는 일이 참으로 옳다. 판윤은 참으로 얻기 어려운 사람이다. 경은 아마 그렇게 못할 것 같다.”

하였다. 권공이 이 말을 듣고 감격하여 울었다.


박석무(다산연구소 이사장)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 신하에 그 임금이다(是臣是君). 권엄 같은 서울 시장을 우리는 원합니다. 정조대왕 같은 통치자도 그리워합니다. 민생과 민권을 그렇게 높게 여겼던 권엄, 그런 신하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통치자, 오늘의 우리는 언제 그런 시장과 그런 통치자를 만날 수 있을까요. 오늘날 이곳저곳에서 일어나는 재개발 지역의 참사들, 예컨대 용산참사에서만 보아도 우리는 권엄 시장이나 정조 같은 지도자들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출처 : 漢詩 속으로
글쓴이 : 몽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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